저는 저에게 트라우마라고 할 만한 경험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트라우마라고 하면 큰 사고를 당하거나 폭력, 재난처럼 아주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뒤 그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힘들어하는 모습을 먼저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리학에 대해 하나씩 찾아보다 보니 문득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장 오픈 때부터 함께했던 직원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처음부터 일을 아주 잘하거나 열심히 하는 직원은 아니었습니다. 이런저런 문제도 있었고 책임자로서 답답한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오픈멤버였고 오랫동안 같이 일한 직원이다 보니 나름대로 애정을 가지고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잘못했을 때 화도 내보고, 달래도 보고, 지금 하는 일이 맞지 않는 것 같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보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이 직원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직원의 아버지가 제 상사를 찾아가 저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화도 났지만 무엇보다 그 친구에 대한 배신감이 컸습니다.
‘나는 그래도 잘해보려고 했는데 내가 했던 행동들이 상대에게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졌던 건가?’
그 일을 겪은 뒤 저는 후배나 부하직원을 대하는 방식이 전보다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예전처럼 한 사람의 문제에 깊이 들어가서 어떻게든 해결해주려고 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선을 두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 사람을 위한다고 하는 행동이 정말 이 사람을 위한 걸까?’, ‘나는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인데 상대방도 그렇게 받아들일까?’라는 생각도 자주 하게 됐습니다.
한 번의 좋지 않은 경험 이후 비슷한 관계에서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도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는 단순히 ‘아주 안 좋은 기억’을 뜻하는 걸까?
우리는 일상에서 ‘그때 일은 나한테 완전히 트라우마가 됐어’라는 말을 꽤 자주 사용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에서 트라우마는 단순히 기분 나빴던 일이나 잊고 싶은 기억과는 조금 다르더라고요.
미국심리학회(APA)는 트라우마를 심한 두려움이나 무력감, 혼란 등 강한 고통을 일으키고 이후에도 사람의 태도나 행동, 기능 등에 장기적인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미국 정신건강서비스국(SAMHSA)도 개인이 신체적·정서적으로 해롭거나 생명을 위협한다고 경험한 사건이나 일련의 상황이 이후 정신적·신체적·사회적 기능 등에 지속적인 부정적 영향을 남기는 것을 트라우마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흥미롭게 느꼈던 부분은 한 사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이후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도 중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아들이지는 않잖아요.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경험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이후의 생각과 행동에 오랫동안 영향을 주는 경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직장생활 중에 생긴 힘든 일은 모두 트라우마일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사에게 크게 혼났던 일, 동료와 심하게 갈등했던 일, 승진에서 떨어졌던 일처럼 직장에서 겪는 힘든 경험을 모두 심리학적인 의미의 트라우마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힘든 일을 겪으면 한동안 그 일이 계속 생각나거나 화가 날 수도 있고, 비슷한 상황이 다시 생길까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반응 자체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 불안하거나 슬프고 화가 나거나, 집중과 수면에 어려움을 겪거나, 일어난 일을 계속 생각하는 등의 반응이 나타날 수 있으며 많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반응이 줄어든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힘든 일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트라우마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의 성격과 이후 나에게 나타나는 반응을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트라우마와 PTSD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저도 예전에는 트라우마와 PTSD를 거의 비슷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둘은 구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PTSD는 우리말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라고 하며, 외상성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뒤 일부 사람에게 발생할 수 있는 정신건강 질환입니다.
NIMH는 성인의 PTSD 증상을 크게 재경험, 회피, 각성과 반응성 변화, 인지와 기분의 변화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 재경험: 원하지 않아도 사건이 반복적으로 떠오르거나 악몽·플래시백 등으로 다시 경험하는 것
- 회피: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장소·상황이나 관련 생각과 감정을 피하는 것
- 각성과 반응성 변화: 쉽게 놀라거나 계속 긴장하고, 집중이나 수면에 어려움을 겪는 것
- 인지와 기분의 변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지속적인 두려움·분노·죄책감, 사회적 고립감 등이 나타나는 것
이런 증상 몇 가지가 있다고 해서 스스로 PTSD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NIMH의 설명에 따르면 성인의 PTSD 진단에는 각 증상군에서 일정한 수의 증상이 나타나고, 그 상태가 1개월 이상 지속되며 일이나 인간관계 같은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지 등을 함께 살펴봅니다. 실제 진단은 정신건강 전문가가 판단합니다.
무엇보다 외상성 사건을 경험한 사람 모두가 PTSD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힘든 경험 = 트라우마 = PTSD
이렇게 하나로 연결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좋지 않은 경험 이후 사람을 피하게 되는 이유
트라우마와 PTSD를 찾아보다 제가 특히 관심이 갔던 부분은 ‘회피’였습니다.
PTSD에서도 회피는 중요한 증상 중 하나로 다뤄집니다. NIMH는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사건·물건을 피하거나 그 경험과 관련된 생각과 감정을 피하는 것을 회피 증상의 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뒤 그 사람과 비슷한 관계에서 조심하게 됐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PTSD의 회피 증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일상에서는 이전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행동을 바꾸는 자연스러운 학습도 일어납니다. 한 번 크게 데인 경험이 있다면 다음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조금 더 조심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직원과 있었던 일을 겪은 뒤 후배나 부하직원에게 선을 긋게 된 것 역시 ‘트라우마 때문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번의 강한 경험이 이후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믿지 않는 것과 관계의 경계를 만드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후배들에게 예전보다 선을 긋는 제 모습을 보면서 저 스스로 조금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못 믿게 된 건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책임자가 부하직원에게 관심을 갖고 도와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상대의 문제를 전부 해결해주는 것까지 책임자의 역할은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를 위한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도 상대에게는 간섭이나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상대가 원하는 대로 모두 해주는 것이 반드시 그 사람을 위하는 것도 아닐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얼마나 많이 해주는가’보다 어디까지가 내가 해야 할 역할이고 어디서부터는 상대가 스스로 책임져야 할 영역인지 구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돌아보기
이번 글을 쓰면서 제가 궁금했던 건 결국 ‘그 일이 내 트라우마였을까?’라는 질문이었고,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어떤 관계에서 상처받았던 경험은 그 사건이 끝난 뒤에도,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내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관계를 맺는 방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지금의 행동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이 사람 때문에 거리를 두는 걸까, 아니면 예전에 겪었던 사람 때문에 미리 거리를 두고 있는 걸까?’
‘지금의 경계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선일까, 아니면 다시 상처받지 않으려고 모든 관계를 피하고 있는 걸까?’
저 역시 아직 그 답을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예전처럼 ‘내 마음만큼 상대도 다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고, 내가 누군가를 위한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 반드시 상대에게도 같은 의미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 이후의 반응 때문에 일상이 힘들다면
힘든 경험 이후 그 사건이 반복해서 떠오르거나 악몽을 꾸고, 관련된 사람이나 장소를 심하게 피하거나, 계속 긴장한 상태가 이어지고, 수면이나 직장생활·인간관계까지 영향을 받는다면 단순히 ‘내가 예민해서 그런가?’라고 넘길 필요는 없습니다.
NIMH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의 증상이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거나 일상생활을 방해하기 시작한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것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심리상담도 정말 큰 문제가 있을 때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상담을 받아보니 꼭 어떤 진단을 받기 위해서만 상담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내가 겪었던 일을 말로 꺼내보고, 그 일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사건이 제게 남긴 가장 큰 변화는 사람을 믿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과 관계에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자료
·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APA) - Trauma
· SAMHSA - Trauma and Violence
· 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NIMH) -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 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NIMH) - Coping With Traumatic Ev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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